1947년 일제가 패망 하든 후
나는 역사적인 하의 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에는 한문 서당에서
3년간 명심 보감 배웠기 때문에
아버지가 2학년에 편입시켰다.
3학년 어느 더운 여름날 나는 학교 갔다 와서
마루에서 빨래 다듬잇 돌을
베개로 하고도 낮잠을 자고 일어 나서
웃으면 입이 비틀어졌다.
아버지가 깜짝놀라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나를 외가집 마을로 손 잡고 가면서
가다가 큰 마을 대리가 있었는데 가게에서
사탕 과자를 사 주시든 기억이 새롭다.
나는 과자를 먹으면서 시골길 십리길을
논둑길 받둑길 산길 을 걸어 외갓집에 도착하여
한의사를 불러와 침을 맞고 대추나무 갈고리로 입에 걸고
며칠을 치료 하여 정상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때 여러날 을 그냔 방치 하
나는 일생을 장애자 로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순간 선택이 나를 구해주신 것이다.
나는 건강하게 자라 씨름 달리기 수영도 잘하고
튼튼하게 자라 지금 76세 라고 하지만 건강만큼은 잘 지키고
행복하게 살며 아직도 회사에서 일하고 노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때 아버지가 이 못난 자식 위해 노력하신 것이
나도 나이 먹어보니 한 없이 감사하다.
내가 장남이어서 기대도 많이 하셨겠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 나이 황혼 길에 와 있다.
아름 다운 마무리냐 또 다른 도전이냐 하는 갈등이 나를 고민스럽게 한다.
안산 반월 SK 사장님이 나를 3개월 같이 일 해보고
가스 안전 요원 자격증을 수령하여 근무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여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자녀들에게 물어보니까
그냥 집에서 이데로 살자고 하는데
나의 욕망은 교육을 받고 자격을 가지고 다시 안산에 가서
기숙사에서 살면서 일 하고 싶은데
반대하는 자녀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스럽다
기회는 내 옆에 와 있는데 여기서 그냥 이데로 아름 다운 마무리를 하느냐?
또 다른 도전을 하느냐? 내가 잘하는 일을 하라.
노래하고 싶은 꾀 로리가 공작의 미모에 주눅 들고
수영하고 싶은 물개 가 치타의 질주에 주눅 든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이 나이에 도전이 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 가 아닐까?
쓸모없는 노인 취급보다 꼭 필요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마지막 나의 선택이 글 쓰는 작가 가 희망이다.
그 동난 써 놓은 수많은 글 퇴고하여 내놓고 노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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