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될 무렵 운조루에 가면 하얀 목련꽃을 만날 수 있다.
구례 산수유 마을을 돌아보고 운조루로 향했다.
하얀 목련꽃을 만나러 달려가면서 혹시나 다 졌을까? 아직 안 피었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달려갔는데...
행운처럼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양반가옥의 운조루를 돌아보고 하얀 목련꽃이 있는 안채 마당을 서성였던 시간이
돌아와 생각해도 참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담아온 풍경과 운조루를 소개한다.
운조루 입구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기르고 재배하는 것들을 펼쳐놓고
여행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건네고 운조루로 향했다.
운조루 입구로 들어서면 우선 긴 행랑채와 연못이 있고,
뒷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택 앞을 흘러 연지를 지나간다.
연지의 다리를 건너면 행랑채를 양옆에 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대문이 나타난다.
대문은 배산인 병풍산과 어우러져 그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권위와 위계가 느껴지는 듯하다.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
조선 영조 때 유이주가 낙안 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고 하는데,
큰사랑 대청 위 상량문의 기록은 1776년(영조 52)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미동 유씨 집안 사랑채 누마루의 당호다.
운조루는 그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의 영화로운 시절과 슬픈 이야기를 한몸에 담고 있으며,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구례 오미리에는 금환락지(금가락지가 떨어진 명당)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
창건 당시의 이 집터에 대해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고
주변이 척박해서 그 누구도 집터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이 집을 지은 유이주가 알아보고 이 땅에 집을 짓게 되었으니
지신은 이것을 고맙게 여기어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고 전하고 있다.
유이주는 본래 안동 출신으로 이 금환락지의 명당에 매료되어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짓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집안의 후손들에 의하면 이 공사를 마무리하고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에도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 리 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연지를 이루는 운조루 앞 연못엔 물이 말라 있었다.
지리산 맑은 물이 연못에 가득하면 정말 멋지다고 한다.
연지 가운데 섬과 연결해놓은 나무다리를 건너보았다.
연지에 물이 찰랑거리면 더 운치 있을 것 같았다.
대문에 걸려 있는 벽사의 의미인 호랑이 뼈
대문에는 유이주가 문경새재를 넘다 물리쳤다는 전설의 호랑이 뼈가 걸려 있는데,
이는 벽사의 의미로 잡귀나 병마와 나쁜 일들이 집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라고....
나는 올려다보면서 정말 호랑이 뼈일까? ㅎㅎ 그런 맘이 들었다.
입장료 천 원을 내면 들어갈 수 있다.
운조루는 대략 1,000평이나 되는 비교적 넓은 대지에, 방형에 가까운 돌담 장을 이루고 있었다.
남쪽에 연지를 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문 앞을 흐르는 시냇물로 일차적으로 외부 공간과의 구역을 정리한 뒤에
대문간과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고. 집 앞으로 정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큰 사랑채의 기단과 화계의 아름다움
운조루에는 세 개의 사랑채가 있었다.
그 중 큰 사랑채와 아랫사랑채는 남아 있지만 안사랑채는 소실되었다.
큰사랑채는 둥글납작한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담 너머 바깥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높게 만들었다. 누마루는 좌우 한 칸을 내민 형식을 갖고 있으며,
북쪽에는 별도의 책방이 있어 학업에 전념하고자 했던 주인의 각오를 느낄 수 있다.
온돌방 앞의 툇마루로 오르는 섬돌은 통나무로 만들어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을 느끼게 한다.
큰사랑채는 바깥주인의 사회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주인의 일상적인 거처는 물론
내객들의 접대 및 문객들과의 대화 등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아랫사랑채는 장성한 아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반면 안사랑채는 주인 어른 내외가 노년에 집안일은 큰아들에게 맡기고 손자들을 돌보며 말년을 보내는 곳이었다 한다.
또한, 특이한 점은 다른 고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사로를 사용한 점이다.
이는 웃어른을 배려한 것으로, 가마가 큰사랑채까지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중문으로 오르는 작은 사랑채
운조루 중심부에는 안채를 두고, 남향의 건물군이 동서축으로 길게 배치된 장방형이었고,
큰사랑은 서쪽으로, 작은사랑은 남쪽으로 중심 채인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바깥사랑 마당과 안 사랑마당을 가운데 두고 병렬로 마주 보면서 동서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디딤과 툇마루 귀틀의 어울림은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듯 봄볕을 받고 있었다.
활주를 받친 사랑채 누마루에 서면
시 한 수 저절로 읊어질 것 같았다.
큰 사랑채 뒤편의 책을 보관하던 책방과 쪽담이 있었다.
이 고택은 담장이 특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담 사이로 핀 동백꽃....
뒤꼍 우물가에는 앵두꽃이 피어 있었다.
봄이면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이 이곳 안채 마당이다.
한그루의 목련꽃 나무와 장독대가 있는 이곳...
안으로 들어서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정말 예쁘게 목련꽃이 피어있었다.
운조루 안채
안채는 장독대가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각기 동서남북을 향하여 배치됨으로써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아래채와 중문 행랑채가 남향으로 길게 돌출되어 행랑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어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오래된 목련 나무가 오래된 고택에 봄을 알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봄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간이 꾸며진 아이들과 며느리들이 쉬는 2층 다락의 날개채
그 옛날에도 2층을 만들어 가족이 쉬는 장소로 이용했다니...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쪽문 창밖을 내다보면 하얀 목련이 핀 풍경과 맑은 봄볕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안채의 기단과 멋스러운 섬돌이 잘 보존되어 바라만 봐도 좋았다.
장독대 화단에는 봄이 완연했다.
거북이를 닮은 부엌 앞의 맷돌도 이 집에선 유명하단다.
기와지붕과 어울려 하얀 목련꽃이 더욱 찬란했다.
99칸이나 되는 운조루였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63칸이라고 한다.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기와지붕 끝에 매달려 청아한 봄의 소리를 읊고 있었다.
봄바람이 들려주는 봄의 소리....
기와지붕을 보면 2층으로 이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고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채를 중심으로 양쪽의 날개가 2층으로 이루어진 점인데 위계에 따라 형태가 다르게 구성되어 있는데,
안채에서 바라볼 때 왼쪽 2층에 꾸며진 다락은 웃어른이 쉬는 장소이고 오른쪽 2층은 아이들과 며느리들이 쉬는 곳이었다고 한다.
웃어른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창의 형태에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썼고 난간이 있어 아래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한 지혜를 만나볼 수 있다.
또 내부에는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있어 그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목련꽃에 반하여
안채 마당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운조루에는 두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큰 쌀독이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며,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타인능해
"타인능해"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 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허용한다는 뜻으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음.
각종 민란, 동학, 여순사건, 6.25 한국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을 지내오면서도
운조루가 지금처럼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쌀독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한 개의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 꽂혀 있던 나무는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나무를 누가 가져갔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운조루의 두 번째 자랑거리이자 이 집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이라고 하였다.
운조루에는 첨탑과 같이 하늘 높이 쌓아올린 멋들어진 굴뚝이 없었다.
운조루의 굴뚝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숨어 있었는데,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며,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이 집의 굴뚝 연기를 보면서 더욱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것을 집 주인이나 목수가 몰라서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든 것이 아니란 사실에 놀라웠고,
작은 것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던 우리 조상들의 아량이 운조루 굴뚝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참 감동이었다. 작은 굴뚝을 보면서.....
운조루에서 배운 우리 고택의 멋스러움과 지혜로움...
그리고 고택 주변에 흐르는 봄 풍경이 마음에 닿았다.
감동적인 봄을 만나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더욱 아름다운 운조루...
행운처럼 만나보게 된 풍경들이 돌아와 생각해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느 해 봄날 또 달려가 하얀 목련꽃 아래 서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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