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 봄날 동네 마당길입니다.
동내 아이들이 모여서 한 아이를 놀려 댑니다.
조선 놈아!
침을 뱉고 발로 차고 못살게 굽니다.
그 아이는 겁을 먹고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뒷걸음을 칩니다.
이제 더 물러설 자리가 없습니다.
담벼락에 기대선 그 아이는 둘러선 아이들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래 나는 한국 사람이다. 저리 비켜.
비키란 말이야!"
하고 큰 소리를 치며 잽싸게 내달았습니다.
집으로 달려온 아이는 엄마 품에 안긴 채
한없이 울었습니다.
엄마 일본이 싫어 일본이 싫단 말이야
그래 춘아
동네 아이들한테 쫓겨온 아이를 끌어안고
엄마도 울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곡식이나 채소 같은 식물에서
좋은 씨앗을 만들어내어 내는 방법을 알아내어
우리나라 의 식량 걱정을 덜어준 우장춘 박사입니다.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일본에서 한국사람 아버지와
일본사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 되든 해 아버지를 여의고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우장춘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어린 우장춘은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조선 놈 자식이라고
놀려 댈 때마다 우장춘은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하고 더욱 마음을 굳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굳세게 자라야 해
어머니는 민들레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춘아 민들레 알지?
아 길가에 피는 노란 꽃이요?
그래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봄이 되면
노랗고 예쁜 꽃을 피운단다.
우장춘의 마음이 상할 때마다 어머니는
춘이 손을 잡고 들로 나갔습니다.
오늘도 우장춘은 엄마의 손을 잡고 들길을 거닐었습니다.
노랑나비 흰나비 가 팔랑팔랑 춤을 추며
반갑게 맞아 줍니다.
아 저기 민들레가 피었네요
우장춘은 달려가서 민들레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민들레는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살아서 예쁜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엄마 민들레는 밣혀도 죽지 않고
어쩌면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글세 그건 엄마도 잘 모르겠는걸
참고 견딜 수 있으니까 그럴 테지
우장춘은 꽃잎을 따서 바람에 날리며 수많은
작은 꽃술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린 우장춘은 어머니와 들길을 걸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 다녔지만.
우장춘은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기 대문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장춘은 어머니를 졸랐어요.
엄마 나 학교 갈래요 학교 보내 줘요 '.
그래 조금만 기다려 곧 가게 될 거야
우장춘을 달래면서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제발 우리 춘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어머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우장춘은 매우 기뻤습니다
학교에서도 춘이를 따 도리고 조선 놈 자식이라고
놀려 대었습니다
두고 봐라 너희가 아무리 나를 짓밟아도
나는 민들레처럼 꽃을 피우고 말 테니...
춘이는 어머니가 말한 민들레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아이들이 귀찮게 하면 우장춘은
학교밭실습지로 갔습니다.
벌들이 붕붕대고 나비들이 팔랑팔랑 춤을 추는
학교밭은 조용하고 평화스럽기만 했습니다.
노란 꽃이 달린 오이랑 헝겊 모양으로 생긴
토마토랑 손가락처럼 귀엽게 생긴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어요 ,
우장춘은 탐스럽게 자라는 열매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익어가는 토마토 오이 고추들이 저마다 굵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른 것을 보고 의문이 생겼어요.
그러던 어느날
연구실이 있는 시험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그동안 피땀흘러 연구한 자료가 몽땅 불타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나 우장춘은 실망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유채꽃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우장춘은 얼마 후에
종류가 다른 두 씨앗의 성질을 합처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운 일이요 1
대단한 연구요! 세상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장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이제 나도 한국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손꼽아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습니다.
우장춘은 하루라도 발리 고국으로 가려고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일본은 우장춘을 보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좋은 씨앗을 만들게 하려고 하였어요.
지금까지 나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하여
일본사람 못지않게 일을 했소.
나를 붙잡지 마시오.
우장춘은 뜻을 굽히지 않고 부인과 자식들을
일본에 남겨 둔 채 홀로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아! 여기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구나.:
1950년 3월 8일 우장춘은 처음으로
고국땅을 밟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나는 이목숨 다 바쳐
아버지의 나라인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우장춘은 환영 나온 국민들에게 굳게 약속을 하고
곧장 부산에 있는 농업시험장으로 갔어요
우장춘은 보잘것없는 실험실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씨감자를 먼저 만들어야지.
식량 사정이 어려운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해서.
짧은 기간에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것이
감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육종학자.
1
1